원주 영원산성

원주 영원산성


문화재분류

사적 제 447호

주소

강원도 원주시 판부면 금대리 산50-2번지

자가용이용

합동청사사거리 제천.신림|종합운동장 방면으로 좌회전 - 금대삼거리 치악산|금대계곡 방면으로 좌측방향(영원산성길) - 판부면 금대리

상세내용

◇시대 : 신라시대, 적의 침입에 대비해 치악산에 위치한 돌로 쌓은 산성

◇내력 : 신라 문무왕 때 이 산성이 축조되었다고 하나, 명확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삼국사기에 궁예가 치악산 석남사(石南寺)를 근거로 하여 가까이 있는 고을을 공격한 일이 있어 당시 궁예가 이 산성을 이용하였던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1291년(충렬왕 17) 원나라의 합단군(哈丹軍)이 침입하였을 때, 향공진사(鄕貢進士)인 원충갑(元?甲)이 원주 백성들과 함께 이 산성으로 들어가 지키다가 적군을 크게 물리친 곳이다. 또 임진왜란 때에는 원주 목사 김제갑(金悌甲)이 주민을 이끌고 들어가 끝까지 싸우다 전사한 곳으로, 임진왜란 당시 치열한 격전지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그 후 이 산성은 한강 상류의 요진(要鎭)으로 한동안 경영되다가 폐허가 되었다.이 성의 전체적인 평면은 삼각형에 가까운 불규칙한 부정타원형으로 산성의 성벽은 동쪽과 서북쪽 일부 구간에 잘 남아 있으나 대체로 붕괴된 상태이며, 전체 둘레는 약 2.4km 정도이다. 옛 기록에 의하면 ‘영원성은 석축성으로 둘레 3,749척, 성내에 우물 1개, 샘이 5곳 있었으나, 지금은 폐하였다’고 한다. 지금도 샘터가 남아 있다. 성안에는 여러 곳에서 건물터가 확인되며, 여러 곳에 성문터가 남아 있으며, 세 곳에 숯가마가 남아 있다. 수습된 유물들은 고려·조선시대에 사용되었던 도자기와 기와류 등으로 그 종류와 수량은 많지 않다.

◇양식적 특징 : 이 산성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체성(體城)과 여장(女墻)이 확실히 구분되면서도 성의 외벽에서는 구분이 불가능하다는 점이며, 또한 여장에 사혈(射穴)이 없다는 점이다. 능선상에 성벽이 꺾어지는 곳은 능선을 타고 진입하는 적을 방어하기 위하여 곡성(曲城)을 마련하였는데, 동남쪽 성벽에 4곳, 북쪽 성벽에 4곳, 서쪽 성벽에 4곳이 있다. 축성의 위치 선정, 용도 시설의 활용, 여장의 완전한 잔존, 성문과 치서의 구조 형식에 있어서도 우리나라 산성 축조방식에 있어서 가장 전형적인 산성의 완전한 모습을 보여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