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법사지

흥법사지


문화재분류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45호

주소

강원도 원주시 지정면 안창1리 517-2번지

자가용이용

원주시외버스터미널 - 우회전(서원대로) - 능촌교차로 양평|오크밸리 방면으로 좌회전(지정로) - 지정면 안창리

상세내용

◇시대 : 신라시기 흥법사의 옛터

◇내력과 유구현황 : 절터 서쪽 영봉산(靈鳳山)의 아랫자락에 있는 흥법사가 언제 처음 세워졌는지는 알 수 없다. 興法寺址는 원주시 지정면 안창리에 있는 寺址로 1984년 6월 2일에 文化財資料 제45호로 지정되었다.적연국사(寂然國師) 영준(英俊)이 932년(태조 15)에 이 곳에서 태어났다는 것과 이 곳에 있었던 진공대사 탑비에서 진공대사가 940년(태조 23)에 이 곳에서 돌아가셨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미 신라말에 거대한 규모의 사찰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절은 고려 태조가 흥법선원(興法禪院)을 만들어 진공대사에게 교화를 맡기자 많은 사람이 모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인근의 정산리 거돈사, 여주 고달사 등과 더불어 고려 전반기의 선종계 절로서 큰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高麗史) 』 세가(世家) 태조(太祖) 23년조에 ·秋七月王師忠湛死樹塔于原州靈鳳山興法寺王親製碑文·이라고 하여 940년(고려 태조 23)에 이미 흥법사(興法寺)라는 절이 있었음을 밝히고 있어 이는 흥법사가 신라 때에 세워진 사찰임을 암시하고 있다. 또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 권46 원주목(原州牧) 불우조(佛宇條)에는 “흥법사는 건등산(建登山)에 있다. 절에 고비(古碑)가 있는데 고려 태조가 친히 글을 짓고 최광윤(崔光胤)에게 명하여 당(唐) 태종(太宗)의 글씨를 모아서 모각(模刻)하였다.”라 하였고, 조선초의 문장가인 서거정(徐居正)의 시(詩)에는 법천정하시제탑(法泉庭下詩題塔) 흥법대전묵타비(興法臺前墨打碑)·라 하였다. 이에 의하면 흥법사는 신라 때부터 고려시대까지의 거찰이었으며 『동국여지승람 』이 편찬된 1480년경(조선 성종 11)에도 흥법사는 폐사(廢寺)되지 않았고 진공대사탑비(眞空大師塔碑)도 원형대로 보존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흥법사가 폐사된 것은 명확한 자료가 없다. 이 절이 언제 없어졌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조선시대 전기까지 절과 진공대사 탑에 대한 언급이 있는 것으로 보아,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1693년(숙종 19) 이 곳에 도천서원(陶川書院)을 건립하였다가 1871년에 폐지하였다. 약 만여평에 달하는 사지(寺址)에는 삼층석탑 1기와 진공대사탑비(眞空大師塔碑)의 귀부(龜趺)와 이수가 있고 금당지(金堂址)로 보이는 대상(臺上)에는 민가(民家)가 있어 축대석 및 많은 유구(遺構)들이 흩어져 있다. 보물 제463호로 지정된 진공대사탑비의 귀부와 이수는 사지의 서북쪽에 인접해 있으며, 이수에는 진공대사(眞空大師)라는 4자의 전액(篆額)이 있어 진공대사탑비의 귀부와 이수임을 알게 한다. 진공대사탑비의 비신은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으며, 진공대사탑은 석관(石棺)을 지니고 있으며, 1931년 현재의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전되었고 보물 제365호로 지정되었다.

또한 흥법사지 중앙에 있는 삼층석탑은 2중 기단에 방형 삼층을 유지하고 옥개석의 받침은 4단으로 낙수면(落水面)은 두껍게 만들어져 있다. 그 밖에 높이 약 3m, 길이 약 60m의 석축을 비롯하여 삼층석탑에서 약 10m 정면에 4기의 주초석이 장방형을 유지하고 있어 이곳이 본래 중문지(中門址)로 추측된다. 이곳 중문지에서는 정교한 용문(龍紋)·연화문(蓮華紋)·당초문(唐草紋)·삼존불(三尊佛) 와당(瓦當) 등이 출토되었으며, 이 외에도 상당수에 달하는 소형의 말·코끼리·사자 등의 토우(土偶)가 출토되었다고 전한다. 석탑의 서쪽 약 100m 지점에는 속칭 승천(僧泉)이 있고 이곳에 길이 약 150m 가량 되는 하수구가 있다. 이 하수구는 사지를 가로질러 뚫려 있어 당시 거대하였던 흥법사의 규모를 짐작케 한다. 한편 흥법사지에서 이치(移置)되었다고 하는 염거화상탑(廉居和尙塔)이 있었는데, 이는 현재 원소재지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되었다. 현 사지에서 염거화상탑지를 전혀 발견할 수 없으며 일본인들에 의해 옮겨질 때 목록 작성에서 차질이 생긴 것으로 인식되어 ‘전흥법사지염거화상탑(傳興法寺址廉居和尙塔)’으로 명명되고 있다.이색(李穡)의 『목은고(牧隱藁) 』, 김구용(金九容)의 『척약재학음집』, 원천석(元天錫)의 『운곡행록(耘谷行錄)』 등의 문집에 흥법사에 대한 시가 전해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