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원사 석탑 및 광배

상원사 석탑 및 광배


문화재분류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25호

주소

강원도 원주시 신림면 성남2리 1060번지

자가용이용

남원주IC 중앙고속도로|춘천|제천 방면으로 우측 고속도로 입구(중앙고속도로) - 신림IC 신림|주천 방면으로 우측 고속도로 출구(중앙고속도로) - 신림IC 영월|주천|법흥사 방면으로 우측방향(88번 지방도) - 신림면 성남리

상세내용

◇시대 : 고려 초기 3층 석탑과 광배

◇내력 및 유물현황 : 치악산 중턱에 있는 상원사 대웅전 앞 탑정에 동서로 나란히 서 있는 2개의 석탑으로 상원사가 쌍탑식 가람의 흔적을 보여주는 유적이다. 두 탑은 모두 2중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을 쌓은 것이다. 1971년 12월 16일에 有形文化財 제25호로 지정된 石塔으로 總高 2.9m의 花崗岩 才質이다. 上院寺 大雄殿 앞에 있는 石塔은 좌우측에 1基씩 2基의 雙塔이 남아 있다. 해발 1,100m 이상의 높은 高地에 사찰이 경영된 것과 이러한 높은 곳에 쌍탑이 있는 것은 특이한 것이다. 쌍탑은 많은 부분이 훼손되었으나 1964년에 거의 완전할 정도로 보수하여 보존되어 있다.
석탑 옆에 불상 뒤를 장식하던 광배(光背)와 불상을 받치던 대좌(臺座)가 남아 있다. 광배에는 부처님의 머리와 몸에서 나오는 빛을 둥근 선으로 새기고, 그 밖으로 불꽃 무늬를 화려하게 조각하였다. 그 안에는 연꽃과 당초(唐草) 무늬를 새겨 놓았다. 1964년에 우측 석탑을 보수할 때에 탑신에서 관음보살좌상(觀音菩薩坐像)?인왕상(仁王像)?아미타불립상(阿彌陀佛立像)?석가여래입상(釋迦如來立像)의 금동불(金銅佛) 4구(軀)가 발견되었는데, 제작수법이 매우 우수하고 신라 때에 유행하던 수법과 같은 형식을 엿볼 수 있으며, 이 광배도 비슷한 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양식적 특징 : 두 탑의 형식은 비슷하며 기단부?탑신부?상륜부로 되어 있다. 몇 장의 지대석(地臺石)을 놓고 이중기단(二重基壇)을 구성하였는데, 하대중석(下臺中石)에는 우주(隅柱)를 주출(彫出)하였으며 4매로된 하대갑석(下臺甲石)의 상면에는 중석받침이 있다. 2매로 된 상대갑석(上臺甲石)의 낙수면(落水面)은 완만하며 위에는 4분원의 탑신 괴임을 두어 탑신을 받았다.1?2?3층의 옥신(屋身)에는 우주가 있으며 각 층의 옥개석은 낙수면의 경사가 급하다. 처마는 윗선과 아랫선이 평행이다가 전각(轉角)에서 약간 반전되어 경쾌한 기분을 주고 있다. 옥신 높이의 체감은 1층 부분에 비하여 2?3층 부분의 체감이 현격히 작은 반면 옥개의 체감율은 적은 편으로 전체적으로 탑의 솟음이 강조된 형태이다. 백마강 일대 산재해 있는 백제계 석탑의 체감비와 유사한 구성을 하고 있다. 상륜부(相輪部)는 좌탑(左塔)에 노반(露盤)?보륜(寶輪)의 일부와 우탑에 보개(寶蓋)?수연(水烟)의 일부가 남아 있어 대부분이 손실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탑에서 주목되는 것은 석탑에서 옥개받침이 없이 사형(斜形)으로 처리된 점이며, 1964년 석탑 보수 때 탑신에서 신라시대 작품으로 보이는 보살상(菩薩像), 인왕상(仁王像), 불입상(佛立像) 2구 등 4구의 금동불상(金銅佛像)이 발견되어 이 탑의 가치를 더욱 높여주고 있다. 오른쪽 탑은 보개(寶蓋)[탑 상륜의 보륜과 수연 사이의 지붕 모양의 장식]와 보주(寶珠)[탑의 상륜부에 놓인 둥근 모양의 구슬]가, 왼쪽 탑은 노반(露盤)[탑의 제일 꼭대기에 있는 지붕돌]?복발(覆鉢)[탑의 복발 위에 주발같이 엎어놓은 장식]?보륜(寶輪)[탑의 꼭대기에 있는 장식]?보주(寶珠)가 남아 있다. 대웅전의 좌측 탑 앞에 있는 광배(光背)는 주형거신광(舟形擧身光)인데 2조 륭기선(隆起線)으로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을 그렸으며 두광 중심부에 원을 새기고 그 주위에 8엽의 연화(蓮花)를 돌렸다. 그밖에 당초문(唐草文)을 조각하고 두광과 신광 외부에는 사실적으로 화염문(火焰文)을 양각(陽刻)하였다. 그러나 신광 부분은 깨져 결손되었고 우측의 대부분이 망실되었다. 대좌(臺座)는 상대석과 중대석이 없으며 하대석의 일부가 남아 8각형의 대좌였음을 짐작케 하며 복판복연(複瓣伏蓮)이 8엽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는 동탑 앞에 놓여있다. 이들 유물은 모두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