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렬사

충렬사


문화재분류

원주시 향토유적 제2009-1호

주소

강원도 원주시 석경길 24 (행구동)

자가용이용

원주시외버스터미널 - 지하상가사거리 충주|제천|KBS 방면으로 우측방향(5번 국도) - 원주교오거리 제천|충주 방면으로 우측방향 - 치악교사거리 치악산|행구동 방면으로 좌회전(행구로) - 충렬사

상세내용

◇시대 : 1669년 건립, 2009년 복원 순국선열을 모신 사당

◇내력 : 충렬사(忠烈祠)는 1291년(충렬왕 17) 원나라 반적(叛賊) 합단적(哈丹賊, 카단)이 원주 치악산 영원산성을 공격하자 원주별초(原州別抄)에 소속되어 있던 향공진사(鄕貢進士) 원충갑(元沖甲)은 결사대 중산(仲山), 방호별감 복규(卜奎), 흥원창판관 조신(曺愼), 별장 강백송(康伯松), 원주 괄리 원현(元玄) ? 원종수(元鐘秀), 유생 안수정(安守貞) 등 다수의 원주 사람들과 힘을 합쳐 이들을 물리쳤다. 이로부터 합단적은 예봉이 꺾여져 여러 고을에서도 굳게 방어하는 계기가 되었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모리 요시나리(毛利吉成)가 이끄는 왜적이 남한강 상류를 따라 평창?영월?주천?신림을 거쳐 원주를 침입하자, 원주목사 김제갑(金悌甲)은 병사와 고을 백성들을 모아 영원산성에서 결전을 펼쳤으나 함락되기에 이르렀다. 김제갑 원주목사는 끝내 죽음을 당하였고, 그의 작은아들 김시백(金詩伯)도 싸우다가 전사하였으며, 비보를 들은 부인 전주 이씨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한편 강원도 조방장(助防將) 원호(元豪)는 1592년 5월 여주 신륵사에서 왜적을 크게 무찌르고 패주하는 적을 구미포(龜尾浦)에서 섬멸하였으며, 이후 8월 왜적에 의해 철원?평강?김화 등이 유린당하자, 병사를 이끌고 김화에 이르러 싸웠으나 왜적에게 굴복되기 전에 절벽 아래로 투신하여 자결하였다. 1669년(현종 10년) 원주 하동리에 14칸으로 건립된 총렬사는 원주 유생들이 상소하여 1670년 윤2월 7일 충렬사(忠烈祠)로 사액되었고, 응양상호군(鷹揚上護軍) 원충갑·원주목사 김제갑·여주목사 원호 등 3위를 배향하였다.

◇양식적 특성 : 고려시대 원주 영원산성 전투에서 합단적과 싸워 승전한 응양상호군 원충갑(元?甲)을 주향(主享)하고, 조선시대 임진왜란 당시 역시 영원산성 전투에서 전사한 원주목사 의재(毅齋) 김제갑(金悌甲), 여주목사 원호(元豪)를 배향한 사우(祠宇)로 1669년(현종 10) 건립하여 이듬해인 1670년에 사액(賜額)되었다. 조선말 대원군 집권시기에 서원?사우를 폐철되면서 없어진 것으로 추정되나 확실한 시기는 알 수 없다. 이후 복원되지 못하다가, 2009년 원주원씨 운곡대종회에서 건립부지를 희사하고 강원도와 원주시가 공동으로 준공하여 매년 원주시민의 정성을 모아 제향하고 있으며 당우는 조선후기 익공양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