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시 향토유적 제2008-2호
강원도 원주시 행구동 344번지
원주시외버스터미널 - 지하상가사거리 충주|제천|KBS 방면으로 우측방향(5번 국도) - 원주교오거리 제천|충주 방면으로 우측방향 - 치악교사거리 치악산|행구동 방면으로 좌회전(행구로) - 창의사
◇시대 : 2006년 준공, 원천석 선생의 영정을 모신 사당.
◇내력 : 원천석(元天錫, 1330~?) 선생의 본관은 원주, 자는 자정(子正), 호는 운곡(耘谷)이다. 고려 말 조선 초의 은사(隱士)로 널리 알려졌으며, 청구영언(靑丘永言)에 수록되어 있는 ‘회고가(懷古歌)’의 지은이로 유명하다. 선생은 1330년(충숙왕 17년) 개성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춘천향교에서 공부하였고, 27세에 과거에 나아가 국자감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고려 말의 정치적 어지러움을 보고 원주 치악산에 은거하여 농사를 지으며 부모를 모셨고, 목은 이색 등과 교유하면서 시국을 개탄하였다. 일찍이 이방원을 가르친 일이 있어 훗날 그가 조선조 태종 임금으로 즉위하여 선생을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태종이 직접 치악산으로 찾아갔으나 미리 소문을 듣고 피하였다. 만년에는 유학자이면서도 불교와 도교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삼교일치론’을 주장하였다. 저서로는 『운곡시사(耘谷詩史)』가 있다. 운곡 선생은 고려왕조를 재건하려는 입장에서 왕조교체보다는 제도개선에 치중하는 입장을 견지하였으며, 또 지방관은 형정(刑政)을 너그럽게 집행하고 인사도 공도에 맞게 하라고 하였다.
선생의 삶에 대해 허목은“군자는 숨어살아도 세상을 저버리지 않는다고 하더니 선생은 비록 세상을 피하여 스스로 숨었지만 세상을 잊은 분이 아니었다. 변함없이 도를 지켜 그 몸을 깨끗이 하였다.”라고 표현하였다. 선생의 정신은 원주의 사상적 기초가 되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저변에 흐르고 있다.
◇양식적 특성 : 일반적으로 사당의 진입문은 솟을 삼문으로 되어 있는데 반하여 평삼문으로 되어 있으며 당우는 삼칸의 조선후기 익공양식으로 복원되어 있다.